[이마테] 유리정원의 물고기(진엔딩 작성중)
제목 바꾸고 이어붙였음.
이마테 AU. 캐붕. 심각한 캐붕. 안 해피한 해피엔딩.
1.
나와 당신의 사이는 간단하게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저 도돌이표라고 간단히 뭉뚱그렸을 뿐이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어제까지만 해도 몸을 겹치고 살을 부비던 침대 위에서 있을 리 없는 온기를 더듬으며 혼자 잠든뒤 다음날에는 다시 그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하며 옷을 벗기고.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휘두른 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서로 입술로 더듬고. 나와 당신은 서로를 대할 때마다 상처를 더해가고 그 상처가 아물도록 상대를 핥아주는 사이였다. 그걸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그걸 당신은 사랑이라고 말할까. 그것을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을 매도하고 비난하고 버리는 순간에도. 그리고 당신에게 버림받고 용서받고 사랑받는 순간에도. 모든 순간에도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고 그랬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신에게 사랑받아야만 했다.
당신이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도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명제였다.
"그래서 그 때 테시마 선배가…"
말을 꺼내던 나루코가 움찔하며 이마이즈미를 돌아봤다.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던 오노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있던 셋 모두에게 테시마 준타의 이름은 안타까운 금기에 속했다. 나루코도 오노다도 이마이즈미와 테시마가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는지는 고인의 생전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각별함이 어떤 의미에 속하는지는 제껴두고도 말이다. 이마이즈미는 셋 사이에 흐르는 거북한 침묵을 조용히 걷어냈다.
"신경쓰지 마, 나루코. 나는 괜찮아."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내 상대를 배려한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나루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과 거북살스러움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고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서 그, 그렇구먼. 미안혀. 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평소처럼 어버버거리며 오노다가 자신과 나루코를 번갈아보고 있는 것을 보며 오노다에게도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잠시 셋 사이에는 젓가락과 식기가 맞닿는 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얼어붙은 분위기가 풀리며 다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마이즈미는 속으로 안도하며 자신이 이상한 표정을 짓곤 있지 않을지를 걱정했다. 이제 한달도 더 지났다. 언제까지 본심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어서야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힘들 것이다. 지금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이제는 괜찮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다 극복했다는 식으로 멀쩡한 척을 하고 있어야 했다. 이마이즈미 슌스케는 테시마 준타를 잃고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모두에게 말해둬야 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따라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이지만.
테시마가 바닷가 절벽에서 투신자살한 이유는 모른다. 남겨둔 유서에조차 테시마는 아무 이유도 적지 않고 자신의 물건과 저금 등의 처분을 이마이즈미에게 일임했을 뿐이었다. 그게 평소와 같은 이마이즈미에 대한 애정어린 심술이라면 그것은 심각하리만치 먹혀들었다. 이마이즈미는 테시마의 물건을 생전과 마찬가지로 남겨두었고 아무것에도 손대지 않았다. 걱정스러워하며 처분하는게 어떻냐고 말하던 지인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아직 자신은 테시마를 보낼수 없었다. 이마이즈미는 건져올려진 시체를 화장하는 순간까지도 테시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받은 유골함은 테시마의 방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바보같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 방이 살아있는 테시마를 위한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이즈미는 그 방에 유골함을 두었다. 방에 들어갈때마다 노크를 하고 테시마의 이름을 부른 뒤 들어가서 한참을 방 안에서 고인의 흔적을 더듬고 마지막에는 유골함에 든 그을린 뼈를 보고서야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죽음 따위가 자신과 테시마를 가를 수 없다는 아집이었다.
테시마가 죽었다 한들 그는 테시마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앞에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졌다고 괜찮은 척 하면서도 이마이즈미는 그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마이즈미가 테시마가 뛰어내린 절벽 아래의 해변가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 곳을 밤중에 홀로 찾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해변가를 걸으며 이마이즈미는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에게 테시마의 무엇이라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되풀이한 회상이었다.
'테시마 씨. 나는...'
마지막으로 테시마를 본 것은 그가 죽기 몇시간 전이었다. 그 날도 평소와 같았다. 두 사람이 여느 때보다 느긋하게 있을수 있었던 싸움 후 화해의 시간. 이상한 낌새는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평소와 달랐던 것을 들자면 그 날의 테시마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마이즈미에게 먼저 팔을 내밀어 목에 두르고 다리를 허리에 감아왔다는 것 정도일까. 다른때보다도 달콤하게 이마이즈미의 이름을 부르고 놓아줄수 없다는 듯 매달리며 열에 젖은 교성을 흘리고서. 자신의 품안에 갇힌 테시마 안에서 파정하고 난뒤 아직도 여운이 덜 가셨는지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에게 키스하고 언제나처럼 욕실로 안고 가 몸을 씻겨주는 동안 테시마가 웃으며 한 말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그때는 몰랐다.
'슌스케.'
'갑자기 왜 이름으로 부르는 거에요, 괜히 심술부리는거 아닌가 불안하다고요.'
'응. 심술이야. 지금까지 부리던 심술하고 비교도 안되는.'
'그래서,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테시마는 대답 대신 샤워기 물에 그의 다리에 묻은 바디샤워 거품을 씻어내던 이마이즈미의 왼손을 잡고 자신의 입가로 끌어당겼다. 쪽, 하고 잠깐 부드러운 입술이 닿은 감촉만이 손등에 남는다.
'테시마 씨?'
'나를 사랑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다 기억하고도 사랑해?'
'그만큼 나도 테시마 씨한테 심한 짓을 했어요. 뭘 새삼스럽게. 사랑해요. 테시마 씨가 말없이 나를 떠나도, 나를 때리고 폭언을 퍼부어도, 나같은건 두번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어디서 뒈지라고 해도,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안기더라도 사랑해요. 테시마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나도 네가 나를 묶고 가둬도 내 발목을 부러뜨려도, 나를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놓아달라고 울고불고 해도, 나같은거 필요없으니 어디로 꺼져달라고 해도, 그래도 사랑해. 하지만 아마 이건...둘 다 바보같은 짓이겠지. 누가 먼저 망가지냐가 문제잖아? 하하.'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가요?'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지만. 아아...정말, 우린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
'......'
'네가 이겼어, 엘리트.'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그 뒤 씻겨주는 중에도 졸기 시작하는 그를 일으켜 기대앉혀서 마저 몸을 닦아준뒤 잠옷을 입혀 침대에 눕힌 게 이마이즈미가 살아있는 테시마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다. 이마이즈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자리에 누워있어야 할 테시마는 없었다. 그 뒤로는 마치 시나리오라도 있는 양 굴러갔다. 미친듯이 테시마를 찾아 헤매던 이마이즈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오고, 차가운 철침대 위에 흰 천으로 가려진 윤곽을 보고, 오열하고 몸부림치고, 부고를 들은 지인들의 위로를 애써 씹어삼키고 장례를 마치는 것이 예정된 양 착착 준비되고 끝났다. 그리고 유골함을 받아들고 나서야 이마이즈미는 깨달았다. 정말로 심술이었다. 무엇보다도 지독하고 불쾌하고 괴롭고 아픈 심술이었다. 그 심술조차도 테시마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어떻게든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고통을 모조리 테시마의 심술궂은 장난이라고 받아들이는 동안만큼은 반대로 테시마의 죽음을 인정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유골함은 테시마의 방에 있었다. 테시마가 즐겨 앉던 의자위에 작은 상자를 두었다. 그 안에는 검어진 뼈조차도 가려내지 않은 유골이 있다. 고인의 상을 치르던 유일한 유족인 이마이즈미가 장례절차를 다하지 않고 받아든 탓이다. 그을린 뼈가 테시마의 시커먼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무엇하나 집어낼 수 없었다. 검은 뼈 하나와 욕설, 검은 뼈 두개와 따귀, 검은 뼈 세개와 외도. 이마이즈미에게 드러낸 수많은 악의들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유해조차도 테시마다웠다.
해변가는 잔파도가 백사장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한참을 백사장을 따라 걷다보면 점점 모래보다 잔돌이 많아지고 거기서 조금 더 걸으면 울퉁불퉁한 돌들만 한가득이 된다. 그 쯤에 멈춰서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높은 절벽이 있다. 괴로운 장소였다. 그럼에도 이마이즈미는 계속 걸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아직도 혈흔이 남은 바위가 있다. 바위를 밟는 소리와 찰랑이는 물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렇게 걷던 중 소리들 사이에 이질적인 것이 하나 끼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콧노래 소리였다. 이마이즈미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런 곳에 한밤중에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올 리가 없다는 상식이 깨진 데서 연상되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낮고 부드럽게 이어지던 콧노래가 가사가 없이 아무 음절이나 붙여 부르는 노래로 바뀌었을 때 그 목소리가 테시마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몸이 떨려왔다. 아직 테시마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게 온전히 살아있는 테시마든, 사람들 말마따나 테시마의 영혼이든 뭐든 상관없이 이마이즈미는 테시마를 찾아내고 싶었다. 노랫소리를 더듬어 한참 어두운 바닷가를 걸어간 이마이즈미가 본 것은 물 위에 떠있는 어슴푸레하고 검은 덩어리였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에서야 그것이 사람의 머리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시마의 목소리로 부르는 콧노래는 그 물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마이즈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것은 물 위를 유유히 흔들리며 떠다니다가 갑자기 해변을 향해 흘러왔다. 그리고 불쑥 물 위로 솟구쳤다. 그 밑으로 드러난 것은 남성의 상반신이었다. 동시에 거리가 가까워지며 겨우 판별이 가능했던 얼굴은...테시마의 얼굴이었다. 테시마의 얼굴을 한 것이 바위 위로 올라와 앉는다. 아니, 앉았다고 해도 될지 모를 모습이었다. 그것의 허리 아래로는 있어야 할 다리가 아닌, 늘씬하게 빠진 물고기의 몸이 달려 있었으니까.
그 날이 이마이즈미가 '인어' 를 만난 첫날이었다.
찰박. 욕조 안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이마이즈미 슌스케."
이 호칭만은 익숙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마이즈미는 대답했다.
"부르던 대로 부르세요.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나도 익숙하지 않긴 마찬가지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인어는 자신에게는 약간 좁은 욕조 안에서 몸을 불편한듯 움직이고 있었다. 바닷물이 아니어도 괜찮은 듯 인어는 오히려 물은 미지근한 쪽이 좋다고 말했었지만, 역시 욕조는 큰 편이 좋으려나. 이마이즈미는 이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인어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마음 한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북받친다. 자신을 떠난 테시마가 생전과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생전과 같은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인어는 테시마가 자주 그랬듯 한심해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이상한 녀석이구나."
"'테시마 씨' 에게 이미 많이 들었어요."
그 호칭에 인어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기 말야, 나 분명 말했는데?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나는 '테시마 준타' 가 아니라고."
"지금 여기 있는 테시마 씨도, 여기 있었던 '테시마 씨' 도 다 같아요."
"바보같은 말을. 여기 있는 나는 인간인 '테시마 준타'의 외형과 기억을 가진 별개의 생물이야. 인간조차도 아니야. 그런데도."
"괜찮아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인어가 바라본다.
그 사람과 같은 목소리로 인어는 말을 걸어온다.
그 사람이 웃을 포인트에서 인어는 웃고, 울 포인트에서는 운다.
그 사람이라면 화를 낼 부분에서 인어는 화를 낸다.
그걸로 족하다고 이마이즈미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읽고 있는지 인어는 핫, 하고 비웃는다.
"엘리트 주제에 바보네."
그런 말을 하면 쓸데없이 더 '테시마 씨' 처럼 보이잖아요 하고 이마이즈미는 조용히 대답했다.
2.
인어를 붙잡았을때 이마이즈미는 인어가 잘 헤엄치지 못한다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인어를 집으로 데려온지 며칠 뒤 인어의 왼쪽 꼬리지느러미가 이지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꼬리지느러미에 대해 묻자 인어는 원래 그랬다고만 이야기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마이즈미는 그 대답을 듣고나서 물에 손을 넣어 그 꼬리지느러미를 어루만졌다. 하늘거리는 것치고는 뻣뻣했고 그러면서도 손에 힘을 준다면 일그러져서 다시 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느러미를 계속 매만지는 이마이즈미를 이상한 것을 보듯 바라보며 인어는 꼬리를 움직여 이마이즈미의 손에서 지느러미를 빼냈다.
"손길이 불순해."
떨떠름한 얼굴로 투덜거리며 인어는 이마이즈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이마이즈미는 그냥 미소지었다.
"뭐야, 기분나쁘게 웃고."
"아닙니다."
"네가 그러면 무섭단 말야, 이마이즈미 슌스케. '이번'에도, 나한테도 그럴것 같아서."
인어의 말에 이마이즈미는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1년전 이마이즈미는 테시마의 왼쪽 발목을 부러뜨렸다. 이번엔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인어가 도망칠수 있는 것은 이마이즈미가 인어를 위해 새로 산 집에 딸린 작은 수영장의 타일로 덮인 저쪽 벽.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그 때야 그거잖아요. '테시마 씨'가 도망가려고 했으니까."
"그래, 그건 아마 테시마 준타가 나빴다고 생각해."
"의외네요, 어떤 부분이 나빴다고 생각하나요?"
인어는 멀리 떨어진 채로 물속에서 얼굴만 쏙 내밀어 이마이즈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입까지 물에 담근 채로 뭐라고 말했다. 보글거리는 물거품이 아마 대답 대신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묻자 인어는 그제서야 얼굴을 물밖으로 내밀어서 말했다.
"이마이즈미 슌스케랑 만난것. 이마이즈미 슌스케를 사랑한것. 이마이즈미 슌스케를 떠나려 한것. 테시마 준타가 나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잖아? 사랑해놓고 내다버리려고 했으니까."
"......"
몇번이나 들은 말이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마이즈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짧게만 대답하자 인어는 한쪽 입가만 끌어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인어를 잡아온 뒤 몇번이고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인어는 이마이즈미와 테시마 사이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이마이즈미가 떠올려 입밖에 꺼낸 일들을 딱히 설명할 필요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일을 이야기하고 둘 사이의 언쟁이나 몸싸움이 화제로 오를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테시마의 잘못이라고만 말했다. 이마이즈미가 테시마를 때렸을 때도 겁간했을 때도 발목을 부러뜨려 평생 후유증이 남게 만들었을 때도 그가 잘못했다고만 말했다. 테시마가 이마이즈미를 만난 것이, 그와 같이 살게 된 것이, 그를 사랑한 것이 나쁘다고. 그렇게 그에게 일그러진 사랑을 쏟아부은 것이 나빴다고. 그를 망가뜨린 것이, 그리고서는 책임지지 않으려 도피한 것이 나빴다고 인어는 소설 인물이라도 평가하듯 테시마를 책망했다.
이마이즈미는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인어에게 그 말을 듣는 것이 기뻤던 한편으로는 슬펐다. 테시마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자신은 잘못한게 없다고 자기방어로 꺼내든 말들을 인어가 녹음해뒀다가 틀어주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몇번이나 했던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을 했을 때의 이마이즈미는 한 번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인어는 둘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모든 잘못을 테시마에게 돌려 지금은 없는 사람을 힐난했다. 심지어 테시마의 죽음조차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도피한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완전한 제3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시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어가 하는 말이라면 어떨까. 애시당초 기억이란 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서류철의 기록처럼 단순히 어디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났고 등이 정리된 사실목록일까. 아니면 그때그때 느낀 감정들까지도 남아있는 것일까.
인어가 테시마와 이마이즈미의 관계를, 그 억지로 맞물린 톱니바퀴를 알고 있다면 그 톱니바퀴 사이에 낀 녹과 기름찌꺼기도 알고 있는걸까. 억지로 맞물려 돌아가느라 부서져 사이에 낀 작은 톱니바퀴의 조각도 알고 있는걸까. 인어는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작은 톱니바퀴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걸까.
테시마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내가 당신을 왜 '테시마 씨'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요."
"글쎄. 그리고 그 전에 우선 그렇게 말하는건 내가 '테시마 준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렇든 아니든 내게는 같다고 전에도 말했었잖아요. 테시마 씨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그리고..."
테시마 씨는 원래 성격 나쁘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인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사온지 한달이 지났다. 인어와는 우습게도 잘 지내고 있었다. 테시마와 지낼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이로제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인어는 이마이즈미랑 있을 때는 재잘재잘 잘도 이야기해댔고 그러면서도 이마이즈미가 없다고 딱히 외로워하지도 않았다. 그 부분은 테시마랑 같았다. 그런데도 그 둘이 서로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잘 지내는 이유를 이마이즈미는 내심 알고 있었다. 테시마와 살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인어와 살고 있는 지금 이 관계의 줄을 틀어쥔 것은 이마이즈미라는 것을. 그때와 다르게 인어는 도망갈수 없고 이마이즈미 외의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다는 것을. 이마이즈미가 아무리 숨막히도록 애정을 쏟아붓더라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느꼈다. 이마이즈미는 그저 자기 애정을 테시마가 받아주기만 했다면 그걸로 좋았다는 것을. 테시마의 마음 따위는 상관없었다는 것을. 테시마가 자신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저 자신을 그의 곁에 둬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어?"
그것을 이야기하자 인어는 질렸단 듯 미간을 찡그렸다.
"테시마 준타가 왜 너한테서 그렇게까지 도망갔는지, 그것도 이제 알았겠네."
"네. '테시마 씨'는 겁쟁이였으니까."
"그래, 겁쟁이에다가 소심하고 네 앞에서는 특히 더 그랬으니까. 그냥 그 인간은 네가 무서웠던 거야. 네가 그렇게까지 쏟아붓는 사랑이 두려웠던 거지. 그래서 테시마 준타가 나쁜 거였는데. 너를 그렇게 만든 건 테시마 준타였으니까."
"그랬군요. 그렇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물어보는 것만이라면 마음대로 해. 내가 대답해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이마이즈미는 입술을 아주 작게 달싹여서 물었다.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당신은 날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인어는 그 말에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마이즈미는 만족했다. 인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만히 이마이즈미를 올려다보다가 살짝 물을 헤치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풀 사이드에 앉아 종아리까지를 물에 담그고 있던 이마이즈미의 바로 앞에서 살짝 장난스럽게 웃더니 그의 허벅지 위로 팔을 얹고 엎드렸다. 헤헤, 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얼굴은 당연히 엎드려 있었으니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편해졌어?"
"그럴 리가 없는건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테시마 씨."
"바보네, 테시마 준타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그리고 이마이즈미 슌스케는 테시마 준타가 행복하기를 바랐었고요. 둘 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비긴걸로 치면 되잖습니까."
인어의 머리에서 연신 물이 흘러 이마이즈미의 허벅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이 조금씩 작아지고 떨어지는 간격이 길어지던 한순간 엇박자처럼 아주 희미한 따뜻함이 허벅지 위로 떨어져서는 바로 꺼져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마이즈미는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젖은 인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인어를 처음 붙잡았을 때와 집에 데려왔을 때, 그리고 이 집에 이사왔을 때 외에는 한 번도 인어를 만진 적이 없는 이마이즈미였다. 손길에 닿는 감촉은 항상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대로 테시마의 머리카락과 똑같았다. 희미한 따뜻함이 간헐적으로 허벅지 위로 연신 떨어지고 차게 식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나는 항상 '테시마 씨' 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어요."
"......"
"지금까지도, 거짓말이었잖아요."
"......"
인어는 대답대신 결국 흘린 눈물만으로 끝내지 못하고서 틀어막은 흐느낌소리를 흘려버렸다.
"거짓말쟁이."
"그만 좀 해."
"진실을 외면하는 나쁜 버릇은 그대로네요."
"시끄러워, 내가 한 거짓말은 하나밖에 없었어."
"왜 그랬어요?"
"네가 너무 대책 없었거든. 죽은 사람 하나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멍청이였으니까."
"그것뿐이에요?"
"아니, 하나 더. 우리가 더 이상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너무 많이 변해버렸잖아."
"상관없어요. 나한테는 같다고, 계속 말했잖아요."
"바보, 멍청이. 머저리. 엘리트."
"폭언이 늘었네요. 거기다 마지막 건 욕도 아니잖아요."
"너같은 놈을 좋아하게 된 내가 잘못이었어."
"그 말, 그렇게 열심히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내 잘못을 떠맡아줄 필요 없으니까."
"어쨌든, 진짜 너같은거 좋아하는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테시마 씨."
"시끄러워, 너 사과하는게 너무 늦잖아. 이제는 필요도 없는 사과 받고 싶지 않아. 뭘 사과하는지는 알고 있어?"
"일단...뭐...여러가지로..."
"짜증나는 녀석.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거야? 변하는게 없잖아.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나는, 지금이 행복한데요? 테시마 씨는 여기 있잖아요."
"......"
"같이 살아요, 테시마 씨. 내가 죽을 때까지."
"와...비겁하다, 너. 진짜...비겁해. 진심이냐?"
"네."
"그러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그러면 같이 못 살 것도 없는데."
"뭔가요?"
"영원히 살아준다면, 그렇게 못 할 것도 없어."
Side. T
나는 연인에게서 도망쳤다. 마지막으로 정사를 나누고서 혼자 조용히 집을 나왔다. 평소에도 자주 그랬었다. 절반은 그냥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감촉에 쫓겨 나가는 산책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밤중에 잠든 연인이 깨지 않게 발소리를 죽여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집을 나오는 도피였다. 그 날의 것은 달랐다. 영원한 도망이었다. 아마 내가 죽는다면 이 모든 상황은 끝날 것이었다.
발목에 실리는 무게가 무겁고 아프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녀석이, 마음은 독하게도 먹었다 싶었다. 1년 전에 그 녀석이 부러뜨린 내 발목은 아마 영구적인 장애로 남을 거라고 했었다. 그 말대로 왼쪽 발목은 간헐적으로 심하게 시큰거리고 조금만 힘을 주어도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아팠다. 그 뒤로 뛰는 것은 커녕 걷다가도 어느새 조금씩 절뚝거리고 있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여러가지를 포기했다고 해도 그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것을 보기 싫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고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그 녀석은 그런 나를 보고 웃었다. 이제서야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거냐고 웃었었다. 바보 아냐? 하고 생각했다. 그 녀석의 마음 같은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걸 견딜 수 없어서 몇번이나 도망쳤으니까.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다는건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나같이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에게라면 그건 두려운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내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고 노력하며 억누른 열등감과 질투심의 대상이 될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나쁜 조합이 있을 수 없다. 원래라면 내가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 녀석이었다. 내가 있든 없든 빛나는 인생을 살고 자기랑 어울리는 짝을 만났어야 했을 녀석이 미쳤다고 내가 좋다고 고백해왔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그러니까...이 모든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내가 그 녀석을 만나고 좋아해버린게 문제였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하고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귀게 된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때만 해도 그냥 한차례 불어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백부터가 문제였다고 생각하지만 그 녀석 탓을 하고 있느냐면 그건 아니다.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나는 그 녀석이 내게 집착하는 것 이상으로 그 녀석에게 집착하고 있었고 그게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나만을 바라보길 원해서 일부러 싸늘하게 대하기도 했고 내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했고 화를 내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과 마음없는 관계를 나누기도 했다. 그 때까지는 순진하고 부끄럼도 남들보다 약간 더 잘 타는 그 녀석을 나는 천천히 나와의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 넣고 길들여갔다. 망가뜨려갔다. 그 결과가 이것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탓할 수 없었다. 내 탓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 바보는 웃으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뿐이니까 아무 문제 없다고만 말한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 것이다. 더 이상 그 녀석의 독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디로 도망치든 나를 다시 찾아낼 것을 아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멀리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는 내가 남길 흔적을 그 녀석이 정리해달라 맡기고.
지금 이 절벽 위에는 신발을 벗어두고.
이런 일로 이렇게 행동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나는 겁쟁이고 무책임하니까. 이 외의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거꾸로하고 떨어져내리면서 그 녀석이 우는 얼굴을 떠올렸다. 잘 우는 녀석이었는데. 아마 이번에도 눈물이 마르도록 울겠지.
욕설을 내뱉었다. 목소리 대신 기포만이 입밖으로 나와 수면으로 떠올랐다. 이런 결과 같은거 누가 생각했겠냐고 치밀어오르는 화를 담아 벽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허리 아래로 달린게 두 다리가 아닌 시점에서 그건 포기했다. 물을 헤치기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는 꼬리지느러미. 비늘. 귀 뒤쪽의 아가미. 죽는 시점에서 보통 이런 미래 따위 상상하지도 않을 텐데. 분명 나한텐 이런 메르헨 따위 안 어울린다. 아니, 남자 인어라는 시점에서 이미 메르헨도 뭣도 아닌거 같은데.
아무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나는 죽은 거니까 목적은 달성이다. 나는 드디어 이마이즈미 슌스케에게서 나를 격리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생각했는데.
"이해할 수 없어."
"뭘 말이죠?"
"네 그 비뚤어진 성격 말야."
너한테서 도망쳐서 자살한 애인이랑 닮았단 이유로 정체불명의 UMA를 잡아오는게 그리 상식적인 행동은 아닐 거라고 지적하자 이마이즈미는 웃었다. 그 말투도 테시마 씨랑 똑같아요. 라고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분명 녀석에게 붙잡혀서 이 놈의 지긋지긋한 집에 강제귀환돼서 욕조에 처넣어졌을때 나는 못을 박았다. 나는 너와 아무 관련없다, 나는 그저 내가 먹은 인간의 외모와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일부러 충격적인 이야기를 적당히 꾸며내 던져주었다. 불길한 이야기 쪽이 나을거 같아 인어공주가 아닌 일본의 인어 쪽을 채택해서 내가 죽은 내 몸을 주워먹고선 지금처럼 되었다고 말했었다. '테시마 준타'를 먹었다고 하면 화내며 다시 버리든 죽이든 할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이마이즈미는 미쳐있었나보다. 나는 새삼 빛나고 있던 녀석을 내가 얼마나 구덩이로 끌어내렸는지를 실감해야만 했다.
"그래서, 네 옛 연인과 닮았단 이유로 나를 여기 둬야겠다고?"
"안됩니까?"
"잡아와 놓고 그렇게 말하지 마. 풀어주지도 않을거 알아."
대답 대신 이마이즈미는 나를 끌어안았다. 피하기엔 욕조는 내가 하반신을 넣을 만큼만 빠듯하게 넓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만족했는지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은 채 몇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언제까지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 기세기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응, 이마이즈미 슌스케."
"그런식으로 선 긋듯이 대답하지 말아주세요."
"어쩌라는 거야. 대답해달란 듯 불러댄건 너였잖아. 그것도 생판 남의 이름으로."
나는 거짓을 택했다. 이마이즈미가 정말 속아넘어가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저 이마이즈미가 나를 거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기에 나는 '테시마 준타'가 아니어야 했다. 이마이즈미는 나를 집에 데려온뒤 내 유골함을 보여주면서 죽은 뒤에도 테시마 씨를 놓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운 듯 말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니까. 그저 '테시마 준타'와 닮았고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을뿐, 인간조차 아닌 괴물이면 되는 것이다. 이마이즈미에게 내가 그런것이 된다면 그때는 버려지든 그 손에 부서지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나에게는 테시마 씨인걸요."
"물 아래에 뭐가 잠겨있는지나 보고 이야기해. 보기 전에 눈부터 좀 비비고."
"꼬리랑 지느러미요? 그게 뭐가 어떻습니까. 다리대신 꼬리가 있는것 정도인데요. 그정도 가지고 내가 테시마 씨가 싫어지기라도 할 거 같아요?"
하하. 메마른 웃음소리밖에 흘릴 수 없었다. 너는 그렇게나 나를 좋아했었나.
이마이즈미는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려고 외진곳에 작은 수영장이 딸린 집을 구했다. 거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수영할 수 있도록 수영장이 설치된 곳이었다. 집을 구한뒤 수영장을 청소하는 것부터 최대한 내게 편하도록 수온을 맞춘 물을 채우는 것은 모두 그 녀석이 손수 했다. 그리고 트럭으로 실어온 수조에서 나를 안아올려 수영장 안에 넣어주는 것까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이마이즈미만의 작은 수조 안에서 나는 밑바닥까지 잠겨보았다. 일렁이는 수면 너머로 일그러져 보이는 인영. 그대로 저편까지 헤엄쳐보았다. 이마이즈미의 모습은 아까보다 훨씬 더 작게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수영장의 벽을 손으로 짚어보았다. 여기까지가 이마이즈미가 내게 허락해줄 수 있는 도피의 거리일 것이다. 아무리 멀어지더라도 녀석을 시야 저쪽에 밀어놓을 수 없는 딱 이만큼이.
"물고기 키워본적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동물 키우는 취미는 없어서, 하고 짧게 대답하는 이마이즈미에게 살짝 심술궂게 키워본줄 알았지, 열대어 같은거. 수조관리 같은거 잘하는거 같으니까라고 웃으며 말하자 이마이즈미는 그저 씁쓸히 웃었다.
"애완동물 같은거 아니라고요, 테시마 씨는."
차라리 애완동물이라고 해주면 좋겠다고 투덜거리자 이번엔 그 녀석이 조금 전에 내가 지었을 법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해드릴까요? 테시마 씨는 나의 모든 것이니까. 나의 가족이고 연인이고 소유물. 그 수많은 역할 중에 애완동물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진 않죠?"
"와아, 성격 진짜 나빠졌어. 이마이즈미 슌스케."
"네, 누구 덕분에."
어째 요즘은 말로 이마이즈미를 이길 수 없는 때가 늘어난 거 같아서 칫 하고 혀를 차며 물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는 떠올렸다. 애완동물, 열대어, 수조. 그 때도 그렇게 물고기를 길렀었다. 이마이즈미가 아니라 내가. 본격적으로 수온을 맞추거나 물풀을 사다 심은 건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에게서 몇 마리인가 물고기를 얻어와 기른 적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먹이를 주고 되도록 미루다 미루다 유리에 이끼가 낄 때쯤에나 마지못해 수조를 청소하고 자갈을 씻어내 물을 갈아주는 정도였지만 물고기는 그래도 잘 자랐고 나는 그래서 그 이상의 필요없는 관심은 주지 않았다. 그렇게 물고기를 기르던 어느날 귀가한 나는 빈 수조를 발견했다. 깨끗하게 씻긴 자갈은 수조 안의 장식물과 함께 욕실 한쪽 플라스틱 대야 안에 담겨 있었고 산소 발생기 역시 콘센트에서 뽑힌 채 한쪽에 정리된 채였다. 물고기도 물도 없는 빈 수조.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반기는 이마이즈미. 조용히 물고기에 손을 댔느냐고 묻자 이마이즈미는 내 관심이 자신 외의 것에 가는 것이 싫다고 말했었다. 내가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보이는 관심조차도 이마이즈미는 그것이 다른 것에 가는 일 없이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이녀석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내게 되돌려주었던 것이다. 거울처럼 반사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관심을 쏟고 모든 애정을 쏟고.
그렇게 해서 내가 그 무게에 짓눌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겠지.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처음부터 녀석을 거절했다면 이마이즈미는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이 내가 죽기전, 그리고 죽은 뒤, 이마이즈미에게 붙잡힌 뒤에도 몇번이고 변해버린 그를 통해 반추할 수밖에 없는 나의 실책이고 죄였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도망친 것조차도 소용없는 지금, 이마이즈미에게 버림받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수조안에서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연극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능하면 나나 이마이즈미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속이고 싶었는데. 이마이즈미는 내가 '테시마 준타'라는 것을 알게 된 뒤 한결 침착하고 얌전해졌다. 대신 훨씬 더 집요해졌다. 주워온 인어와 사육자의 관계일 때가 오히려 덜 귀찮았을 정도다. 아무튼 빌어먹을 정도로 잘 된 일이다. 죽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게 없질 않은가. 아니, 달라진건 하나 있다. 이제는 이마이즈미랑 같이 걸을 수도, 자전거를 탈 수도 없다는것 정도? 나는 새삼 나 자신을 칭찬했다. 잘 했다, 세계제일의 얼간이 같으니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마이즈미는 이 몸을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인다. 귀에 새겨놓으려는 듯 이름을 부르고 좋아한다고 말한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좋다는 듯 젖은 몸을 놓질 않는다. 나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을 테지만. 이마이즈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이제 이마이즈미의 곁에 있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도망칠수 없는, 이마이즈미가 나를 위해 준비한 정원과도 같은 물속. 유리전시장 같은 이 물속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만의 것으로 존재할 생각이다. 그가 연모하고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연인으로서. 그를 목마르게 갈구하며 그만을 바라보는 그의 모든 것으로서.
그는, 내게 영원을 약속해 주었으니까.
"테시마 씨."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눈 앞에 있는 이마이즈미의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이 맞닿자 이마이즈미는 약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마주 키스에 응하며 혀로 입술 사이를 비집어 들어왔다. 그 동안 다른 손은 물속에 잠긴 내 손을 붙잡고 세게 깍지를 껴온다. 한시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양. 숨이 가빠오도록 한참이나 키스를 나누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지고 이마이즈미는 숨을 몰아쉬며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닦아냈다. 나도 숨을 쉬기 위해 물속으로 잠겼다. 입을 뻐끔거리자 부글거리며 토해져 나오는 공기거품들. 시야를 흐리게 하는 거품 너머로 이마이즈미를 볼 때마다 내가 인어공주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순간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키스를 나눈뒤에 들이마시는 짧은 호흡의 시간. 그리고 그 거품을 걷어내고 다시 이마이즈미를 마주하는 시간을.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마이즈미는 여기에 있다고 안도한다.
"사랑해요, 테시마 씨."
" ."
달싹인 입술을 읽었는지 이마이즈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1) "영원히 함께 살아갈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노멀엔딩
(2) "우습죠, 나만을 바라보게 하는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 배드엔딩 1
(3) "같이 살아갈까, 네가 만든 이 수조 안에서, 둘이서." - 진엔딩
(4) "바보 아냐? 같이 산책도 할 수 없는 이런 몸의 어디가 좋은거야?" - 배드엔딩 2